#123 그럴 수도 있지....
어린 시절의 내가 가졌던 한 줄기 참언 중에 이런 게 있다.
"그럴 수도 있지...."
덜 자란 탓에 몇 년 갖고 있지 못하고, 생활 속에 묻혀버렸지만,
이제 다시 찾아보고 싶은 말 중의 하나다.
그때 당시에는 모든 세상사를 꿰뚫고 설명하는
아테네의 저울처럼, 법륜의 축처럼 느껴졌었지만 갈 길이 먼 나는
나아가야 할 길을 일러주지 못하는 무책임한 말로 느껴져서 정이 식었다.
"시험에 낙방했어, 어쩌면 좋지?"
"음... 그럴 수도 있지..."
"몇 년간 사귄 애인과 헤어졌다."
"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달관한 듯한 큰 대답하나로 모든 문제를 비껴 흘려 보냈다.
그래도 나 자신의 문제까지는 웬만큼 넘어 갈 수 있었다.
내가 겪는 일 모두 역시 넓은 세상 중에 흔한 한 조각 티끌일 뿐이며,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그저 그런 사소함 이었으니까.
하지만, 가끔씩 겪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과의 충돌에선 혼란이 왔다.
지금은 역시 또 다른 엉터리 대답을 갖고 있지만 그때 당시엔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것들....
항상 선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이 아닌가?
정의는 왜 불의에 약한가?
그럴 수도 있지로는 설명이 안되었다.
그것마저 그럴 수도 있지라고 크게 한번 뛰어넘어야 된다고 느낄 순 있었지만,
정작 다리가 짧은 나는 머뭇거리다가 돌아서고 말았다.
아마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옳다고 믿는 것과 현실이 부딪히면, 어떤 이는 행동으로 해결하고,
어떤 이는 어쩔 수 없는 인내로 해결하고, 또 어떤 이는 신앙으로 해결해본다.
이제 어느 정도 철이 들기 시작한 나는
또 다른 방패를 쥐었다.
"사연이 있겠지..."
세상 일에는 모두 인과(因果)의 산물이고,
그 복잡한 인과의 내용을 신처럼 모두 들여다 볼 수 없는 한,
선악의 구분은 무의미한 일이다.
다만 집단은 보편적인 의견에 따르고 있을 뿐....
나는 굳이 그 속에서 묻혀버리기 싫을 때
그 방패로 나를 가리고 한 번쯤은 되돌아 본다.
'아마도 그렇게 된 것에는 나나 그 사람도 모르는 사연이 있겠지....'
"그럴수도 있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나약한 인간의 유리방패지만,
사는 연습을 하기엔 그럭저럭 쓸만하다....^^
혹시 또 아나? 그렇게 살다 보면 그 말의 진정한 넓이를 배울 수 있을지.....
특히 요즘같이 고기 아끼는 척 하는 낚시하기엔 딱 알맞다.
누군가 떼 고기를 죽였다. 훌치기 낚시를 한댄다.
낚은 고기로 패대기를 친다더라.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되뇐다.
"쩝, 사연이 있겠지...."
물론 누군가 나의 생명을 끊는 순간에도
"사연이 있겠지...." 라며 태연히 웃을 자신은 없다.
다만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