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 중에 하나가

누구나 인간은 숨겨둔 보조 밧데리 같은 게 있어서,

체력이 고갈된 극한의 상황에서도

한번 더 꿈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감기와 몸살이 심하게 왔다.

깨질듯한 두통과 함께 며칠 전 캐스팅 연습하던 팔과 어깨가 쑤시며, 오한이 나더니

현기증마저 도는 게 그동안 몇 번 겪어보지 않은 심한 증세다.

간신히 퇴근하며, 내일은 아마 쉴 것 같다고 사무실에는 일러 두었다.

바닥에 등을 딱 붙인 채 에너지 소비율을 낮추며

하루 밤을 버티고, 아침이 되었다.

세수를 하면서 고민.... 출근을 할까 말까?

잘 잔 덕분에 에너지 게이지는 많이 회복된 것 같은데, 악착같이 출근하자니 어쩐지 서글프다.

에라, 다시 따뜻한 이불 속으로 몸을 뉘였다.

밀린 비디오나 빌려 보며, 오후에 상태가 좋아지면 캐스팅 연습이나 나가야지....

요즘 날이 따뜻하니 샛강도 춥지 않을꺼야.

그렇다면 계류는....

며칠 동안 따뜻했으니 기온은 꽤나 올랐을 테고,

안개가 낀 것으로 보아 수온도 제법 올랐을 터, 비가 왔으니 더욱 좋은 때 일듯....

물론 이럴 때 쓰라고 누군가 달아 준 건 아닐텐데,

갑자기 몸 한쪽 구석에 숨어 있던 보조 밧데리가 꿈지럭 꿈지럭 작동하더니

어느새 나는 창고에 나가 웨이더와 신발을 챙기고 있다.

낚시대와 가방도 챙기고, 두툼한 옷들을 챙겨 입고는

초코파이 하나 달랑 먹고는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갈까?....

올 겨울 계획 중에서 눈불개는 이미 한번 살피러 갔으니

그만하면 되었고, 또 집적댈 필요는 없고,

나머지 또 하나의 계획인 겨울 계류를 보고 싶었다.

얼음장 밑의 썰렁한 계류는 벌써 몇 해 동안 보았고,

한 겨울에도 움직이는 계류를 살피러 가고 싶었다.

때마침 좋은 기회군.

영동을 가기엔 보조 밧데리의 용량이 넉넉하지 않을 것 같고,

내린천을 가자니 깊은 잠에서 잠시 깨서 비상식량 챙겨먹고

다시 잠들 애들을 집적이는 것 좀 그렇다....

잠들지 않는 계류, 기화천을 가기로 했다.

길도 수월코....^^;

출근시간이라 제법 막힌 길은

4시간 쯤 걸려서야 기화천의 입구인 첫번째 보에 도착하였다.

기화천 전체가 안개에 쌓여 있다.

기온이 그리 낫지 않고 해도 없는 탓에 물안개는 피어 올리지 않지만,

늘 반가운 그 모습 그대로이다.

한참을 살피다 여전한 라이즈를 확인하고,

주섬주섬 장비를 챙겼다.

자작 9ft 계류대에 새로 준비한 4번 DT라인,

늘 3번 라인으로 거리가 짧았었는데,

4번을 들고 서니 어쩐지 가까워 보인다....^^

드라이로 우선 탐색해보기로 하고,

22번 미지를 던져 보내니 잘은 입질이 반복되며 훅을 튀긴다.

다시 포말 아래로 좀 더 가까이 훅을 보내자,

슬며시 동그라미 라이즈,

그리 커 보이지는 않는데, 좌우로 라인을 가르며 달린다.

돌틈으로 숨기도 하고, 점프도 한다.

달래어 오니 손바닥 보다 조금 커 보이는 파 마크가 아직 선명한 꼬마 무지개 송어다.

길가라서 그런지 라이즈만 보이면서 늘 예민한 딱 한번의 입질만 보이던

줄곳 날 궁금하게 만들던 녀석들이 바로 이 녀석들이었구만...^^

강추위 끝에 찾아온 온기와 불어난 수량 덕분에

그동안 굶었던 허기를 채우느라 별로 꺼리지 않고 덤벼 드는 듯 하다.

가시바늘을 몇 종류 test 해보았지만, 꼬마 갈견이들의 욕심만 보인다.

지금 수온은 거의 8도에 육박한다. 이 정도라면 수동적 먹이활동과 적극적 먹이활동을

하는 딱 중간 수온이다. 기화천의 녀석들이라면 충분히 움직이기 시작할 온도다.

게다가 이 수량이라면....

아마도 녀석들은 소에서 조금씩 벗어 나와 있을테지.

최근 수온은 아마도 4~5도 정도였겠지....

하류로 내려오면서 혹시나 하고 잔 리플과 그 속의 포켓을 살폈지만,

녀석들을 여기까지 올라오게 하면 겨울이 아니지....^^;

수량이 많아지면서 여울과 플랫이 이어지는 부분이다.

지난 늦여름과 가을에도 간간이 먹이 활동을 하는 것을 확인한 곳이다.

물이 불었다고 해도 겨울이라 수심은 채 50cm 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다지 움직임도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소로 도망치기 딱 좋으면서도 넓은 물 흐름이 하나로 모이는

독특한 지형에 호박돌이 두 어개 가려 있고, 바닥이 군데 군데 파여 있어

숨어지내기 딱 좋을 것 같다.

조심조심 상류로 올라가 물을 건넌 다음, 기어서 포인트이 맞은 편 물가에 도착했다.

조금씩 천천히 접근해서 물속에 쭈그리고 앉았다.

우선은 흥미를 끌기 위해서 16번 정도의 두툼한 내츄럴 캐디스를 흘린다.

약간 굵은 갈견이의 입질로 보아, 가을 상황과 비슷할 듯....

수풀 아래로 좀더 가까이 사이드 롤 캐스팅으로 다시 프리젠테이션....

여울이 마악 끝나는 지점의 오목한 곳에서 바닥 돌(?)이 떠오르더니 라이즈를 한다.

바닥 돌은 점프를 두어 차례 해대더니,

상류로 냅다 달린다.

나는 나머지 녀석들의 교란을 막기 위해서 줄을 풀어서 바닥 돌을 하류로 내려 보낸 후,

바늘을 뽑았다.

겨울 아닌 겨울 속의 움직이는 계류였다...^^

웨트 낚시를 해보기로 하고, 언제나 믿음직한 짙은 올리브색 바디의 다크카힐을 맸다.

흐름은 중간이 쎈 흐름과 건너편 물가의 아주 느린 흐름,

역시 두 줄기가 선명하였고, 녀석들은 느린 흐름 쪽의 경계에 몸을 숨기고 있다.

우선은 느린 곳에 훅을 넣고, 빠른 쪽에 라인을 넣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느린 쪽은 수풀 아래다.

두 어번의 실수 후, 가까스로 훅을 적당한 수심 속에 넣고 돌리자

투둑이는 입질을 보여 왔다.

훅킹을 하지 않자, 바닥 돌은 꿈틀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바닥으로 가라 앉는다.

웨트 보다는 긴 로드를 이용한 님핑 쪽이 나을 것 같다.

나 역시 바닥돌이 되어서 훅을 흘려 보니 똑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하기는 무리 일 것 같아서

조용히 후퇴하고는 마커를 달고 겨울의 왕자, 프린스 님프를 맸다.

갈견이들이 쉴세 없이 훅을 집적댄다.

14번으로 훅을 조금 더 키워서 다시 보냈다.

그래도 갈견이 녀석들은 마커를 토독이기도, ?짧게 끌고 들어가기도 하면서 얕은 곳을 지나고,

깊은 곳에 들어서자, 입질 자체는 크지 않지만, 약간은 묵직하면서도

느릿한 마커의 멈춤이 있다.

꿈틀이며 아까와 똑 같은 상황의 반복들.....

색상은 브라운으로 통일되는 듯 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그렇다면 훅의 선택성은...?

이러한 드문 상황에서라면 녀석들도 그다지 훅을 가리지 않을 것 같다.

특별히 훅을 바꿔 볼 필요도 없을 듯.....

간간히 떠내려 오는 18번 정도의 꼬마 하루살이 던들이 보인다. 검정 미지도 날고.....

하루살이는 짙은 브라운 몸통에 옅은 브라운 날개를 가졌다.

그래서인가? 꼭 그럴 것 같진 않지만, 색상을 바꾸면 반응이 더뎌 지는 것으로 봐서는

뾰족히 이유는 모르겠다.

일단 바이비지블을 메이 비슷하게 맨 18번 브라운 색으로 바꿔 매었다.

매는 동안 대를 치우고, 몸을 낮춰서 시간을 벌었다.

물러간 녀석들이 올라 오길 기다렸다가,

조금 전진한 곳에서의 라이즈를 확인하고 훅을 보냈다.

이번엔 조용한 틈을 타서 갈견이들을 젖히고 바닥 돌이 여울에 가깝게 붙어 있었다.

잘못된 캐스팅으로 티펫이 선행하는 프리젠테이션에 첫번째의 입질이 왔지만

튕기기 인지, 티펫에 걸려 훅이 뜬 탓인지 그냥 보낸다.

짧은 거리가 에어리얼 멘딩을 쓰지 않고, 이번엔 로드를 기울여서 확실히 커브 루프를 만든 후 여울 속으로 훅을 먼저 보냈다.

아까의 그 바닥 돌이 다시 떠 오른다.

기운찬 헤드 엔 테일링.....

개체 중에서 그나마 좀 굵은 녀석들은

따뜻한 겨울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소와 여울 끝을 회유하는 모양이지만,

나름대로의 조심성은 유지하고 있는지, 상황에 그나마 어렴풋이라도 맞춘 훅에야

의심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오랜 역사의 낚시 대상어였던 이유로 이제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송어낚시는

교과서 위주로 국영수에 꾸준히 공부하면 된다는 우등생의 경험담처럼

나같은 엉터리 낚시꾼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과목(어종)들에게도 노력을 더하면 응용이 될까?

미리 물속에 손을 넣어 웬만큼 적셔서 식혔지만,

물 속에서 닿은 녀석의 촉감은 한마디로 cool 이였다.

차겁다기 보다 시원한 느낌....

물보다 더 차거운 녀석은 보조 밧데리 속에 몽롱한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준다.

아마 얘들도 보조 밧데리 켜고 졸린 눈을 비비며,

사력을 다해서 찰나를 놓치지 않고 밥 먹으러 나왔겠지....

다시 주섬주섬 챙겨 기화천을 나왔다.

점심을 굶고 초코렛 우유 한 잔으로 하루를 버틴 놀라운 보조 밧데리의 위력을 실감하며,

대략 다섯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서 처남 생일의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집에 도착하였다.

돌아와서 다시 자리에 누우니....

참으로 낚시꾼 다운 짓이다. 이럴 때 보조 밧데리가 동작하다니....

보조 밧데리로 동작하는 낚시꾼과 고기가 함께 한 겨울 낚시라니....

사는 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닐텐데,

참으로 속편한 녀석의 조행이었다.

머릿 속에 남는 건

꿈속 같이 아득한 안개낀 강원도 길.....

그리고 나의 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