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전람회에서


 

오늘은 어쩌다 혼자 조용히 점심을 먹게 되어서 일찍 마쳤다.

차분히 봄길을 거닐다, 그림 생각이 나서 사무실이 있는 빌딩 지하에 있는 갤러리가 떠올랐다.

요즘 전시 중인, 뭐, 격조가 어쩌고 저쩌고라는 타이틀의 한국 근대미술전....

 

무료 입장인터라 벌써 두 어번 다녀왔으나 오늘 또 다시 들린 이유는

청전(靑田)이 있기 때문이다.

청전 이상범선생의 작품은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근대 한국화가 중에서도 독특한 필체로 유명한 분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의 거친듯하면서도 따뜻한 화풍이 좋고, 아련한 듯한 작품의 속내가 좋다.

게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효원(曉原)이 전시 중이다.

 

한쪽 벽면 전체를 할애한 청전은 효원(曉原)과 유경(幽景)이 나란히 걸려 있다.

효원은 제목대로 새벽벌판을 그린 작품이다.

가로 3.5M에 세로 0.45M의 독특한 구도와 함께 적당한 거리에 서서

눈을 약간 가늘게 뜨고 감상하면, 그림 양끝의 아스라한 모습과 함게

새벽벌판의 풍경이 떠 오른다.

적당한 구릉이 있는 들판에 좌에서 우로 제법 굵은 물이 흐른다.

잠시 눈을 감고 상상을 보탠다.

거기 서서 캐스팅이나 한번 해보면 좋컷구나......

이런 된장, 여전히 난 낚시꾼....-_-;

 

다시 눈을 모아 그림의 가운데를 살피면 새벽일을 나서는 촌로와 누렁이(소) 한 마리가 걸어 간다.

대개의 산수화 공식처럼, 자연 속에 묻어 있는 조그만 인공물(사람포함)이 등장하는데,

청전의 말년 작품엔 농부와 소가 주로 많다.

부창부수(夫唱婦隨)와 같은 작품엔 부부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소와 농부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들이나 산을 걷는다.

불현듯 떠올랐다.

왜 하필 소냐? 개나 말도 있고 사람도 많은데....

촌로가 걸어가는 새벽들판 혹은 가을들판, 겨울들판은

언제나 시작과 끝이 아스라하다.

알고 보면 결국 나 혼자 걷는 우리 인생과 비슷하게 앞으로 난 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다.

그 옆에 함께 걷는 길동무는 차라리 말이 없는 동물이,

게 중에도 나만큼 묵묵한 소가 어울리지 않을까?

헤어지게 될지 모르는 애인보다 그럴 염려가 없는 친구가 더욱 소중하다는

요즘 사람들의 우스개 아닌 우스개처럼

언젠가는 홀로 걸어야 할 이 길은 말없이 언제나 묵묵한 녀석과 함께 라면

서로 이별의 부담 없어 좋을 듯 하다.

 

여기서 난 다시 고기를 떠올린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의 길동무는 고기 이겠지.....

잔꾀 부리지 않고, 한결 같고, 말없이 묵묵한 고기야 말로,

낚시꾼의 진정한 오랜 친구가 될 수 밖에 없겠구나.

친해지고 다시 서먹해지는, 살면서 지나치게 되는 낚시꾼 친구야 많겠지만,

평생을 나란히 걸을 낚시꾼의 친구는 고기 뿐 아닐까....

 

나란히 걷는다....

가까워졌다 멀어져 가는 사선이 아닌 평행선.

제 아무리 노력해도 가까워 질 수 없는 사이이지만,

늘 곁에 머무르는 내가 정한 내 길의 길동무.

 

나는 고기를, 자연을 참으로 내 맘 편하게 데불고 놀고 있구나....

아마 사람이 갖는 무식해서 속 편한 특권이겠지.

 

갑자기 그림 속의 누렁이가 콧김을 뿜으며 옆길로 달아 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 니가 정한 길이 아니라면 도망가!

그리고 고기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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