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강원도 조행
회사에서 동계휴가란 게 생겨서 지난 월요일에 조용하게 혼자서, 그동안 그려왔던 강원도를 다녀 왔다.
원래 다른 낚시와 달리 이 플라이 낚시라는 게 서로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좀 이기적인 낚시인데다가
이 낚시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친구랑 가기도 좀 어렵다. 지난 초여름에는 절친한 친구랑 같이 가기도 했으나
고기 얼굴도 못 보고 온지라 낚시에 큰 취미가 없는 그에게 또 다시 가자고 하기도 미안하다.
조용한 계곡에서 혼자만의 세상인양 착각하며 호젓하게 플라이 라인을 날리는 재미도 알고 보면 쏠쏠하다.
플라이 낚시꾼들에게 꿈의 대상어인 야생송어, 열목어, 산천어 들이 있는 강원도 조행은
언제나 많은 기대를 불러 일으킨다.
광적인 매니아들은 시즌이면 한달에도 서너번씩 다니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일년에 몇 번 못 다녀오는 지라 더 더욱 기대가 컷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아내와 애기 얼굴을 한번 보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챙겨 3시반 경에 출발......
그동안 홈페이지에 그림 많이 넣는 걸 싫어해서 TEXT로만 채웠더니 딱딱하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번엔 꼭 고기사진을 찍어 오리라고 카메라도 챙겼다.
그리고 가면서 들으리라고 전에 구해 뒀던 Underworld의 Pearl's Girl(요즘 유행한다는 Techno류) CD도 챙겼다.
웬걸 CD 체인져에 실을려고 CD 케이스를 열자 빈칸이다. 애기 들려준다고 거실 CDP에 물려뒀었나 보다.
좀 덜 신나는 음악으로 올림픽 대로를 타고가다 고속도로에 올라 섰다.
확장공사가 완공된 영동고속도로는 왕복 4차선에 언덕도 없어진 듯하다.
예정대로만 달리면 3시간 만에도 도착할 듯....
강원도로 넘어서자 도로는 눈길,빙판길이었다. 게다가 고질적인 짙은 안개까지....
내린천을 가서 열목어 얼굴을 보려고 속사 톨게이트로 나왔건만 길은 온통 눈밭, 고속도로는 그럭저럭 눈을 치웠지만
산길은 아직 그대로일 것 같아서 도저히 내린천 넘어가는 꼬부랑 고개길에 자신이 없어서 차를 돌렸다.
그나마 만만한 기화천으로 출발, 장평 톨게이트를 나오자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한다.
눈길을 엉금엉금 기어서 평창쪽으로 오다가 아직 운전도 초보인 나는 급커브 길에서 살짝 미끄러져서
앞쪽 범퍼 옆을 가드레일에 살짝 받았다. 와장창! 안개등도 해먹었군.
혼자 도망온 게 벌써 죄값을 하나 싶어 속으로 뜨끔했지만 이까지 온 걸 어쩌랴 싶어 조심 조심 길을 재촉했다.
고개를 몇 개 넘고 드디어 이 고개만 지나면 미탄면, 미탄면에서 기화천까지는 10분 정도 밖에 안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왠일, 차가 마지막 고개를 넘지 못하고 내가 밟는 엑셀레이터와 상관없이 뒤로만 슬슬 미끄러져 내려왔다.
앞의 사고도 있었던지라 후진으로 겨우 고개를 내려와서는 평창읍에서 카센타를 몇 개 돌며
강원도민들의 새벽잠을 깨워 가며 체인을 사서 달았다.
새벽잠 값인지 거의 2배되는 체인 값을 물어주며 단 차는 언제 그랬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 잘도 고개를 넘어간다.
휴우~ 이제 기화천 입구..... 몇번을 왔지만 들어가는 길은 늘 헷갈린다.
다시 강원도 산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도착했다.
이 기화천은 한겨울에도 더운 용천수가 나오기에 그 유명한 아침 물안개를 모락모락 피워올리고 있었다.
나도 컵라면에 아내가 챙겨준 보온병의 물을 모락모락 김을 피워가며 붓고......
아침을 대강 먹고보니 벌써 9시반이었다. 오는데만 무려 6시간......
어차피 새벽 타임은 끝났군. 날씨가 추우니까 기온이 오르면 입질이 오겠지 라며 맘을 푸근하게 먹고
첫번째 보에서 시작했다. 계류를 위해 민물낚시대를 개조해서 만들어 둔 2번 플라이대를 준비하여
계류로 내려가려는 순간 웬 차가 한 대서서 말을 건낸다. "오데서 오셨어요?"
오랜만에 듣는 강원도 말씨..... 또다른 플라이 낚시꾼이었다. 몇마디 얘기를 나누고
난 계류에서 캐스팅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는 캐스팅에 워낙 낭창대는 낚시대라 플라이 라인이 제대로
던져지지 않고 흐느적 거리고 있다. 아까 그 플라이 꾼은 나의 캐스팅 실력을 보더니
도움이 안될꺼라고 생각했는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갑자기 캐스팅이 잘 됐다. 역시 난 아직 멀었어......... -_-;
물을 막아둔 보 아래서 뭔가 약간 큰 녀석들이 철푸덕 대며 라이징(고기가 있다는 조짐)을 해대고 있었다.
날곤충을 닮은 드라이 플라이를 달아서 던졌건만 전혀 구미가 안 댕기는 모양이다.
내가 자랑하는 훅들 중에 하나인, 기화천에서 채집한 실물을 본 따 만든
눈달리고 넓쩍한 메이플라이(하루살이) 님프(물속 애벌레; 구더기가 아니고 납짝한 귀뚜라미 닮았다) 를
던졌더니 마커(찌 역할을 하는 작은 부표)가 쏙! 잠겼다. 갑작스런 입질에 타이밍을 놓친 나는 그냥 보내고 말았다.
그 뒤로는 도통 입질이 없었다. 이 계류에서의 고기들은 길가에 위치하고, 하도 많은 플라이 꾼들이 설쳐대는지
어찌나 입질이 조심스러운지 모른다. 한번 썼던 플라이 훅은 바로 기억하는 모양으로 다시는 물지 않는다.
강 바닥을 뒤져보니 메이플라이 님프는 거의 없고, 강모래로 집을 지은 캐디스(날도래) 애벌레만 몇마리 보인다.
바닥을 까맣게 뒤덮고 있는 것들은
역시 겨울의 우점종인 검정색 미지(모기붙이, 깍따구 같은 쪼그만 날벌레) 님프들이었다.
그래 매치 더 해치(Match the Hatch)를 해야지.....
(매치 더 해치란? 플라이 낚시의 주요 이론으로 낚시 장소에서 낚시 대상어가 주로 먹는 먹이감을 본뜬
플라이 미끼를 사용해서 낚는 것을 말하며, 그 먹이감은 계절, 시간, 수중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바뀐다)
갖고 있던 미지류를 포함한 대여섯 종류의 라바(구더기 같은 애벌레)를 써 봤지만 잠잠 무소식.....
그 뒤로 훅 박스(플라이 훅들을 모아서 보관하는 통)에서 그럴듯한 플라이 훅을 다 꺼내 시험해봤지만
그 녀석들을 꼬시는 데는 실패했다.
돌아서 계곡을 나가는 순간에도 등뒤에선 그 녀석들이 철푸덕 대고 있다. 화내게.........
손가락 만한 금강모치라는 귀여운 녀석들만 활개를 치고 드라이 훅을 쫓고 있었다.
좀더 하류로 내려가서 예전에 야생송어를 몇마리 뽑아내던 포인트로 가서 훅을 흘려 보지만
송어의 흔적을 볼 수도 없다. 송어는 아닌 듯한 산천어 같은 녀석이 한마리 방황하고 있었다.
기화천에는 산천어가 없는데...... 아차 기화천엔 초보도 올 곳이 못 돼지.......
이 초보도 낯선 강원도 계곡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점심을 혼자 꾸역꾸역 먹고 다시 계류로 들어 갔다.
지붕을 고치던 마을 주민들이 우리동네 앞 개울에서 뭘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본다.
그래도 꿋꿋하게 씨~익 웃어주고,
하류의 좀 쎈 여울로 내려가서 급한 물살에 님프 흘리는 연습을 좀 더하고
4시가 되어서 낚시대를 접고 다시 차를 몰았다.
아까 그 고개를 넘어서 앞바퀴의 체인을 풀고 조심 조심 운전을 해서
영동고속도로를 타니 곧 졸음이 밀려온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속사 휴게실에 들려서
잠시 눈을 붙이려 했으나 피곤한 탓에 잠도 안온다. 음료수를 좀 마시고
부지런히 운전을 해왔다.
혹시나 해서 기름을 만원어치 더 넣었지만 이제 경부 고속도로를 탓는데
벌써 기름이 반 눈금 밖에 남지 않았다. 추월도 하지 않고 정속 운전했건만.......
졸음 운전을 막기 위해 창문을 열고 달린 탓에 이미 얼어번린 맘을 또 다시 조려가며
올림픽대로를 타고, 오늘 조행의 마지막 스릴까지 느껴가며 무사히(?) 집에 올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 8시반.....
10시간이 넘는 운전, 5시간이 넘게 서 있던 시린 찬물......
계획했던 송어는 구경도 못했다.
무슨 조행기가 왔다갔다에 다 써먹고 고기 잡은 얘기는 없으니 웬일이냐고?
이게 보통 초보들의 플라이 낚시 조행이다. 이제는 별로 실망도 하지 않는다.
간혹 잘 잡히는 날도 있지만 이게 현실이다.
담엔 잘 잡히는 날 얘기를 한번 해보자. 아마 그건 내년 초여름은 되어야 할 것 같다.
덕분에 그날 저녁 집에 오니 갑자기 오한이 들더니 몸살이 나버렸다.
술을 좋아하던 탓에 일년에 한번씩 나던 몸살이 겹쳐 버린 것이다.
어제 하루를 꼬박 굶고 혼자 앓았다.
몸살기운을 겨우 이긴 나는 지금 휴가의 마지막 날,
장모님께서 끓여주신 생강차를 마시며, 보채는 애기를 달래면서 이 글을 쓴다.
낚시보다 고마운 가족들......
담엔 꼭 Underworld CD를 챙겨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