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출조 전날 챙길 것


 

남자를 망가뜨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다름질이 되지 않은 구겨진 셔츠를 입혀서 출근시키는 일이다.

 

플라이 낚시꾼을 망가뜨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훅박스 없이 낚시를 내보내는 것이다.

 

제법 오래 봉급쟁이를 한 남자라면 오래된 양복이나 낡은 구두 같은 것쯤은

약간의 경력과 연륜처럼 보일꺼라는 착각으로 별 문제 없음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세탁 후 다름질 되지 않은 채로 셔츠를 입고 출근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초라한 일이며,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함께 구기는 짓이다.

어렸을 때는 가끔씩 개의치 않고 입고 나가기도 했으나 봉급쟁이 때가 조금씩 더 짙게 낄 수록

그런 쪽은 더 얼굴이 얇아 지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아침 출근시간에 혹 다려진 셔츠라도 없으면 수염을 못 깍고, 아침 요기를 포기하더라도

셔츠를 부랴부랴 다려서 입고 나가곤 한다.

 

마찬가지로 오래된 낚시꾼이라면 사실 장비가 싸구려라든가 웨이더가 닳아서

헤지고 물이 새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을 수 있다.

때가 낀 낚시조끼나 지퍼가 고장난 낚시가방, 닳아서 갈라진 낚시줄 정도의 궁상이야 자신에게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날 하루의 낚시를 위한 훅 조차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은 낚시꾼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 뿐만아니라 자격을 저버리는 짓이며,

그마나 오래된 연륜이라는 남아 있는 옷을 던져버리며,

띄엄띄엄, 진지하지 않은 낚시나 하는 메뚜기 한철 낚시꾼으로 전락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장비 한 두 가지야 오래된 낚시꾼끼리 다니다 보면 현장에서 여유분을 빌려 쓸 수도 있지만,

훅은 좀 상황이 다르다. 혹시라도 혼자 가는 경우라면 다시 돌아 오면 되지 않은가?

 

플라이 낚시에서 훅을 빌어 가며 낚시를 하는 일보다 더 궁상스러운 것은 없다.

타잉을 할 수 없어서 훅을 사야 하거나, 어쩌다 훅 패턴을 배우고 남의 낚시를 살피는 일로

낚시꾼끼리 훅을 선물받고 나누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아예 빌린 낚시로 낚시꾼 생활을 연명하는 것은 낚시꾼 아닌 척하는 것만 못하다.

 

낚시꾼다운 아주 자그마한 자존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출조 전날, 밤을 약간 새서, 몇 개의 훅이라도 매면 된다.

하지만 다리지 못한 셔츠처럼 훅박스를 잊고 가는 상황은 도무지 방법이 없다.

나 역시 어쩌다 훅박스를 집에 두고 낚시가는 날이면

하루 종일 낚시가 찝찝하며 남의 집 안방의 화장실에 앉은 듯이 속이 불편하다.

내 낚시가 아니라 남의 낚시를 빌어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출조 전날 가장 확실히 챙겨야 할 것이 훅박스가 아닐까?

 

물론 다른 사람과 자연에게도 따뜻해야 할 낚시꾼의 마음을 챙겨야 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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