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느림과 플라이 낚시
요즘 다시 느림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만큼 세상이 빨라 졌단 얘기겠지....
디지탈과 인터넷, 초고속 통신....
양과 속도만으로 경쟁하던 사람들이 이제 여유를 되찾고 싶어하는 것 같다.
빨리 달리면서 볼 수 없었던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
나 옆에서 넘어지는 꼬마아이도 살펴 보게 되고,
어느새 내가 달리는 이 길의 끝은 무엇인가 를 자신에게 되물어 볼 수 있는 여유...
내가 즐기는 플라이 낚시를 살펴보면 이것도 낚시 중의 느림이 아닐까?
손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낚시대와 채비, 그리고 미끼를 사서
알려진 포인트에 던져만 두면 고기를 낚을 수 있는 일반 낚시와 비기자면,
장비를 구한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의 캐스팅 연습이 있지 않으면
아예 채비를 던져 볼 수도 없고,
어느덧 던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원하는 미끼를 구하기 위해
플라이 바늘묶기를 익히는 데도 역시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된다.
정작 제대로 낚시를 시작하는 데만 빨라야 몇 달, 길면 몇 년이 걸리는
이 플라이 낚시는 낚시 중에 느림 임에 틀림없다.
물론 어느 낚시라도 제대로 배우자면 끝이 없을 테지만,
시작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낚시는 드물 것이다.
그런 탓인지 요즘사람들에게 플라이 낚시는 관심은 많지만
누구나 쉽게 덥썩 덤벼들지 못하는 듯 하다.
; 하지만 막상 시작해보면 시간은 후~딱 가는 것 같다....^^
플라이 낚시라는 느림이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조급함을 버린다는 것일 것 같다.
물질에 기초를 둔 '바른생활'을 학교에서 배운 우리들은
늘 뭔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 남들보다 빨라야 한다는 불안감,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꼭 이뤄야 된다는 강박관념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플라이 낚시라는 것은 시작하고, 제대로 시작하고도
막상 고기를 낚아 손에 쥐어보기란 정말 쉽지 않다.
과연 이런 걸 고기가 물까? 하는 의구심을 스스로가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최초의 한 마리'를 낚아 보기까지는 몇 달, 심지어 1년이 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엔 기를 쓰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지만,
결국 다들 그냥 포기하고 꾸준히 다녀보는 것 같다.
그러다 욕심을 버리고 아무 생각없이 던진 바늘에 갑자기 고기가 응해 온다.
"어? 세상이 원래 이런 건가?"
잠시 혼란스럽지만, 결국 혼자만의 조급함이란 쓸데 없음을 알게 된다.
난 금방 낚을 수 있었다고?
그, 그건 재수다.....-_-"
그리고 플라이 낚시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면서부터는 그 뒤에 숨어 있는
무한의 세계가 보이는 것 같다.
세상사와 마찬가지로 배워도 배워도 끝도 없는 플라이 낚시....
그때부터는 달관한 노승(老僧)처럼 숲속의 외길을 혼자 느긋하게 걸을 수 있는,
정말 조급함을 버리게 될까?
둘째는 가끔은 '천천히'도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 것 같다.
외국인이 비꼬는 한국사람의 고질병 중에 '빨리빨리' 라는 게 있다지만,
실제로 빨리빨리는 우리의 모든 생활에 스며 있다.
먹고와 싸기, 일하기와 놀기 뿐만 아니라 태어나기와 죽기까지도...
; 본인이 언제 죽는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을 보라....
플라이 낚시에서 캐스팅을 처음 배우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느리게 보다는 너무 빨리 낚시대를 휘두르게 된다.
새로 캐스팅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 치고 너무 느린 캐스팅으로 문제가 된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남보다 더 멀리, 더 멋지게 캐스팅을 하고 싶어서 더욱 힘차고 빨리 낚시대를 휘두르지만,
오히려 라인은 엉켜 온다. 마치 삶처럼....
먼저 캐스팅을 알게 된 사람의 도움으로 혹은 스스로의 경험 끝에
내가 가진 개념보다 조금만 더 천천히 캐스팅을 하고,
낚시대와 라인 그리고 내가 가진 고유의 리듬을 찾고 서로 조화되면
캐스팅은 자연스레 얻어진다.
누군가 느릴 수록 우아하다고 했던가?
적당히 두툼한 한지에 물기를 뜸뿍 먹은 한 줄기 먹선을 그린 듯,
느릿 느릿, 둥글 둥글 뻗어 가는 고수의 플라이 라인 궤적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 난 너무 좋으면 소름이 돋곤 한다.....-_-"
그리고 고기에게 접근하기 역시 '천천히'가 필요한 것 같다.
저 멀리 보이는 고기를 낚고자 후다닥 뛰어 가봐야 이미 고기는 놀라 달아난다.
가끔은 못 보고 지나친 발 앞의 숨은 고기도 달아난다.
하지만 먼 산 보고 나도 몰래 고기도 몰래, 엉금엉금 가다 보면 어느새 고기 옆에 다가 있다.
산다는 것의 발걸음을 조금만 늦춰보면 뒤도 돌아볼 수 있고, 옆도 돌아볼 수 있고,
현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는
나 그대로의 자신을 들여다 볼 수도 있다.
언제나 서 있을 수만은 없지만, 가끔만이라도 늦춰 보자.
마지막으로는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멋진 계곡에서 뿐만 아니라 비록 썩어가는 개천일지라도
한 손에 낚시대를 쥐고 또 한 손에 라인을 쥐고
낚시 삼매 속에 바늘을 바라보다 문득 느낀 그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춰진 듯 하다.
나도 몰래 숨을 멈추고, 어떠한 흐름도 없이.....
진시황의 오백나인으로 구한 불로초로도,
우리네 조상님들의 가래와 가시나무로도 못 막았던 세월이 아니던가?
정신없는 일상을 쪼개고 쪼개서,
어쩌다 한 번 다가간 이 낚시는 우리의 삶을 멈출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그 시간엔 평소 할 수 없었던 딴 생각을 해도 좋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루하게 보낸 하루가 있어 봤는가? 그 얼마나 긴 일상인가?
복에도 없는 억지 장수(長壽)를 누리려 하지 말고
가끔은 시간을 느리게 해보자.
플라이 낚시,
그것은 아마도 바퀴도 없이 굴러가는 우리를 멈출 수 있게 하는 브레이크와 같다.
커브 길과 내리막 길, 그리고 낯선 장애물이 나타나면
잠시 브레이크를 밟아야 겠지?
그리고 가끔은 내가 처음 고기를 낚았을 때,
처음 캐스팅을 배우던 때를 생각해보자.
그동안 벌써 나는 느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