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야간 타잉
야간, 심야, 한 밤중....
어두움이 주는 알 수 없는 느낌....
원시시대 불을 얻기 전부터 가졌으리라 생각되는 인간 근원의 공포,
까만 정적 속에 자신의 존재감 마저 숨길 수 있는 역설적인 안락,
눈을 감으면 누구나 침묵하게 되는 어릴 때의 요술처럼
어두움은 고요함과 이어지고,
그 속에서 인간은 굳건히 딛고 있던 바닥을 없애,
끝도 없는 자신 만의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락은 몸과 마음을 불사르는 나방의 '열락'도 될 수 있고,
자기성찰을 통한 석가의 '니르바나'도 될 수 있다.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는 옛말이 있다마는,
똑 같은 일상일지라도 일단 밤에 한다면 뭔가 얄딱꾸리한 느낌이 난다.
난 요즘 그러한 밤에 즐기는 일이 새로 생겼다.
딴 생각 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바로 바늘 묶기(타잉)다.
아직은 봉급쟁이라 주중에는 낮 시간이 없고, 휴일이라고 하더라도
애기가 아직 어려서 낯선 걸 보면 무작정 덤비기 때문에 도구과 재료를 무심히 퍼 널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묶은 바늘을 몇 개 보여줘 봤는데 무척이나 좋아해서 놓지 않으려 해서 곤란한 적이 있기도 했다.
그런 이유들로 주로 밤에 플라이 바늘을 매는데
다행히 아내도 일찍 잠드는 편이라 호젓하게 맘 놓고 작업할 수 있는 건 역시 밤이다.
밥상을 펴고(변변한 책상이 없어서...-_-;) 재료 박스를 가져다 놓고,
연장통과 바이스를 꺼내든다.
어떤 날은 플라이 낚시 책을 한 가득 쌓아 놓고 이 패턴, 저 패턴을 뒤적이며,
무작정 매 보는 경우도 있고,
몇 일 전부터 구상하던 새로운 패턴의 스케치를 몇 장 붙여두고 밀렸던 작업에 들어가기도 한다.
가끔은 출조 전날 모자란 훅 박스를 채우려고 졸리는 눈을 부벼 가며 주섬주섬 상을 펴기도 한다.
그런 날 중에 제일 맘에 드는 날은 역시 무작정 매는 날이다.
뾰족하게 맬 바늘도 없지만 어쩐지 바늘을 매고 싶은 날....
그런 날은 굳이 그동안 잘 들었던 전투용 바늘이나 내게 모자란 보급용 바늘을 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한의 공간 속에 자유롭게 마음을 날려 고기를 위한 바늘이 아닌 나를 위한 바늘을 매는 것이다.
내 맘대로 매어 보고 내 뜻대로 묶어 보는....
그 대상이 바늘과 터럭이 아니어도 좋다.
늘 고기나 쫓아 다녔지, 언제나 한번 날 낚을 생각을 해 봤던가?
12시에 다 되서야 시작한 '놀이' 같은 일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난다.
보통은 2~3시 전에 마치지만 생각이 한 껏 퍼져가는 날은 혹은 막혀서 더딘 날은 4시를 넘기도 한다.
밤새 바늘을 맨 다음날은 늘 푸석푸석한 얼굴에 낮엔 자리에서 졸기 일쑤지만
어쩐지 그 자유 시간을 버릴 수가 없다.
낚시대를 들지 않고도 낚시를 하는 시간이며,
고기 낚지 않고도 뭔가를 풀어 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록 성찰의 단계나 니르바나의 발자국의 쫓지 못해도 좋다.
오밤중에 혼자 뭔가 몰입한다는 것 자체가 멋지지 않은가?
어쩐지 생떽쥐페리의 "야간비행"이 생각난다.
야간 타잉..... 그것은 추락이 아닌,
나의 비행을 해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