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선을 늘려라....
이번 설 연휴에 나는 본가가 부산이라 서울의 식구들을 이끌고 다녀왔다.
이제는 삼부자가 한 자리에 모이기가 드문 일이라 짧은 일정을 쪼개 낚시를 다녀왔다.
첫 번째의 온 가족의 낚시에 플라이 낚시로만 덤벼본 바다 낚시에서 '꽝' 이란 걸 했고,
다시 아쉬워 동생과 다녀온 두번째 낚시에도 나는 '꽝'을 했다.
낚시라는 것이 고기 낚는 얘기가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잠시 딴 생각이 났고,
잊기 전에 남겨 두고 싶다.
이어지는 연휴에 집에서 뒹굴기가 지겨워지기 시작하고, 딱히 할일이 없어 보이는 동생에게 넌지시 물어 본다.
" 우리 오후에 낚시나 가까? " " 어데? " " 일요일 갔던 거기 학꽁치 함 더 보러 가자 "
" 엇그제 다녀왔는데 또 갈 수 있나? 당근 가야제...^^; " ; 동생은 반어법을 애용한다....-_-;
그렇게 해서 갔다.
동생은 원투를 대비해서 3호 릴대, 난 10피트반 6번 자작플라이대에 각자의 학꽁치 채비.....
무작정 택시를 타고, 송정을 지나 도착한 포인트에는 거센 바람과 파도에 이미 꾼들은 철수 중이다.
아직 가녀린 몸매의 학꽁치라 파도를 이기기엔 벅찰테지....
철수하는 한 낚시꾼에게 파도가 덜할 다른 포인트를 물어 보고,
염치없이 차까지 얻어타고 장소를 옮겼다.
같은 낚시꾼이라 두말없이 호의를 건내는 그들이 고맙기도 하고,
어쩐지 고향만 내려가면 낮짝이 두터워지는 것 같아 내가 우습다...^^;
도착한 곳은 길가의 갯바위라 손은 많이 탓을 텐데, 양식장이 조금 떨어져서 포인트로는 약해 보이지만,
수심이 제법 깊고 톳(해초의 일종)이 군데군데 가득한게 그럭저럭 학꽁치가 모이기 좋아 보인다.
이미 몇 명의 꾼들이 대를 벌리고 있다.
동생과 나는 각자의 채비를 매고 드디어 시작했다.
좁은 포인트에 선점한 낚시꾼들이 있어 할 수 없이 골자리에 앉아 행여나 꼬일까 밑밥을 쳐보지만,
벌써 밀려온 거센 파도에 포말이 심해 어려울 듯하다.
다행히 몇 명의 낚시꾼들이 철수하여 먼 바다와 바로 뚫리고 직벽아래의 괜찮은 포인트에 앉을 수 있었다.
동생이 첫 수를 한다. 3호대(바다 릴대)라 뻣뻣하지만 적절한 힘으로 학꽁치를 쳐 낸다.
어쩐지 학꽁치는 가을 코스모스를 닮았다.
낚여 올라오며 하늘대는 모습이란.....
눈부신 몸매.....
난 그 동안 벌써 3번째 훅을 바꿔 보지만 전혀 입질이 없다.
20번 크레이지 찰리, 18번 윙없는 찰리, 22번 붉은 미지라바, 심지어 크릴에 비벼서 던져도 봤다....
또 한번 낚아 올린 동생의 학꽁치는 내 얼굴을 스치고 떨어진다. 난 얼른 줏어다 비닐 봉다리에 담고,
녀석들이 달아나기 전에 곤쟁이(작은 붉은 새우 일종)밑밥을 한 주먹 뭉쳐 던진다.
" 형! 입질이 장난 아닌데, 거의 감으로 채야 겠어 "
동생의 말을 듣고 내 낚시대를 걷어 두고, 동생의 낚시를 살폈다.
낚시가방도 없이 바늘과 줄 몇개 주머니에 담아 급히 나선 낚시라 제대로 된 채비를 갖추지 못했고,
꼬마 막대찌를 겨우 세워둔 급조한 엉성한 채비였지만 주위의 낚시꾼들에 비해
잦은 챔질을 해대는 걸 보면 만만한 실력은 아님을 나는 인정해야 했다.
파고의 높낮이가 1.5M 가까이되는 파도와 세찬 바람에 막대찌의 끝은 쉴새없이 흔들리고 잠겼다, 앉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정작 입질이 와도 알아 보기도 힘들 것 같은 상황이다. 게다가 학꽁치의 입질이란....
그 와중에 파도의 높은 끝에 바다가 잠시 호흡을 멈출 무렵,
찌는 움직인 것도 아니고 아주 미세한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자, 동생은 챔질을 했고,
저녁 볕에 반짝이는 한 마리의 학꽁치가 달려 올라 온다.
" 뭐야 그렇게 입질하는 거야? "
나도 채비를 끊고 학꽁치 용 2B 막대찌를 달았다. 채비가 다소 무거워졌지만,
슈팅헤드라인이라 캐스팅에는 문제가 없다. 맞바람이 세차고, 동생이 왼쪽에 서 있어 백핸드 캐스팅을 해야 했지만
그럭저럭 연습이 된 듯하다.
학꽁치가 모여 있음을 알리는 옅은 포말이 이는 포인트에 연이어서 직격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수심은 바꿔보고, 봉돌을 옮겨보고, 심지어 드라이 훅을 넣어도 봤지만 여전히 무소식이다.
다시 예민한 더 작은 꼬마 스티로폴 마커를 붙여 잠긴 인디케이터를 써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나 나름대로 계류의 급류에서도 님핑을 하느라 마커보기 연습을 좀 한 것 같아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리라 생각했지만, 바람과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에서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솔직히, 나의 플라이 훅이 가짜미끼라서 고기를 낚을 수 없다는 생각보다,
동생의 낚시를 보고 입질이 와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어서 고기를 못 낚고 있을 꺼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플라이낚시의 스티로폴 마커라면 어릴 때부터 쓰던 바다낚시에서의 방울찌와 거의 똑 같다.
막대찌는 바람부는 날이면 보기 어렵다고 늘 방울찌를 달아주시던 아버님 덕분에
둥글고 반쯤 잠긴 인디케이터라면 아주 익숙해야 했지만,
그동안 띄엄띄엄 낚시를 했지만 바다와 민물의 찌낚시 위주로 한 동생은 감각을 잊지 않았고,
플라이 낚시를 한답시고, 멍청히 물이 서 있는 저수지에서나, 기껏해서 급류에 잠겼다 올랐다하는
마커만 한동안 보아오던 나는 감각을 잃고 퇴화한 것이다.
분명히 낚시는 그동안 동생보다 내가 많이 다녔음에 분명할텐데....
우찌보면 동생은 한가지 칼로 나날이 날을 갈아 그 깊이를 늘렸고,
난 이 칼, 저 검 뒤져가며 맘에 맞는 연장을 쥐느라 허송세월 한 셈이다.
어엇! 잠시 딴 생각하는 그 와중에 동생은 학꽁치 3호 바늘(플라이 훅으로 18번 정도)로
20 이 좀 넘는 감생이(감성돔)를 낚아 낸다. 이 곳에선 꽤 드문 녀석인데....
" 다른 입질을 해오더니 이 녀석이었네 " 바늘이 적어 벌써 몇 마리를 놓쳤단다.
미끼는 누군가 버리고 간, 갯바위에서 줒은 너덜대는 학꽁치용 크릴인데....
학꽁치 첫 수를 하면 꼭 풀어 줘야지 하고 다짐했던, 그 잘난 캐치 엔 릴리즈 한번 해볼 기회도 나는 못가졌다.
나는 점점 기가 죽는다...-_-;
어릴 때 읽었던 무도(武道)에 관한 서적에 있던 얘기다.
한 스승이 도장의 바닥에 백묵으로 길고 짧은 두 선을 그려놓고 제자들에게 묻는다.
짧은 선을 가르키며 " 이 선이 다른 선 보다 길어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겠는가? "
제자들은 한쪽 눈을 감아 보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두어도 보고, 물구나무까지 서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답은 없다.
제자들이 지칠 무렵 스승은 말없이 다시 백묵을 들어 짧은 선을 이어서 길게 늘린다.
어느덧 원래의 긴 선 보다 더 길어져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도 낚시의 방법을 단지 플라이 낚시로 택했을 뿐이지
플라이 낚시 그 자체로 빛나는 칼은 아니다.
플라이 낚시를 하던, 훌치기 낚시를 하던 그 기본에 충실해야 겠다.
그 기본은 낚시꾼 각자가 정해야 될 목록일테고....
우리의 낚시는 늦게 도착한지라 얼마지나지 않아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그만 접어야 했다.
동생은 고기 낚느라, 난 딴 생각하느라 몸이 얼어 몹시 떤 줄을 몰랐지만
갯바위를 빠져나오자 한기가 심했다. 마을에 들어가 간단하게 요기를 하자고 의견일치가 되었지만,
어쩐일인지 금방 빈 택시가 왔다.
동생 말에 따르면 '평생 못잊을 맛의 아쉬운 라면' 을 포기하고 우리 둘은 택시를 탔다.
아버님께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아 기회를 얻은 나는 고기 다듬기를 맡았다.
동생이 하나 하나 정성스레 낚아 올린 고기는 회를 뜨기로 하고 "작업"에 들어 갔다.
좀 어렵지만 나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학꽁치도 모두 세장뜨기를 했다.
모두에게 감사하며....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온 식구가 나눠 먹고, 아버님께 따로 몇 점을 남겨두었다.
특별히 학꽁치는 국화꽃 한 점을 내고, 또 한 점은 초간장 절임을 하여 올렸다.
갓 잡은 감성돔의 살 한점엔 아직도 가시지 않은 인광이 붉다.
아버님께서는 오랜 만에 먹어보는 회같은 회라고 동생에게 칭찬을 하셨고,
다듬기만 한 나도 덩달아 흐뭇해졌다.
어쩐지 다른 낚시에 휘둘려 얼빠진 듯한 플라이 낚시꾼의 하루였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까지 나의 선이 짧은데 뭐, 어쩌랴....
나의 선을 계속 늘려 볼 뿐.....
내게 있어서 다른 선들은 충분히 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