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구두를 닦으며....
왠일인지 지루한 오전을 보내고,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어라...? 오른쪽 구두 굽이 망가져서 덜렁 거린다.
음.... 오래 신긴 신었지....
망가진 구두를 질질 끌며 점심을 해결하고 가까운 구두방으로 향했다.
; 여기서 구두방이란 구두가게가 아니고 닦고, 수선하는 집이다...-_-;
평소에 자주 가진 않지만 적당한 연세의 주인장이 재밌는 분이라 가게 되면 꼭 거길 간다.
굽만 두번째 가는 나의 낡은 구두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작업하는 동안 간간히 다른 분의 구두를 닦는 모습을 앉아 구경할 수 있었다.
물광 2번, 불광 2번 그리고 그 사이에 주인장의 손가락으로 직접하는 구두 맛사지 한 번이 곁든
광 내는 모습은 마치 청자에 상감을 입히는 장인의 예술적 손놀림과 비견할 만하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최선을 다한 주인장의 광내기는
제 아무리 낡은 구두라도 한여름 풍뎅이의 철갑과 같이 견고하게 반짝이는 표면을 갖게 된다.
음.... 구두 닦는 일도 멋진 일이군....
이제 주인장은 수 십년의 경력으로 이젠 구두만 봐도 주인의 체형, 성격 등이 눈에 보인단다.
그렇다면 혹시 나란 녀석을 이미 파악 하고 있으실까?
난 평소에 구두를 거의 안 닦는다.
늘 구두는 먼지에 지저분하다. 게다가 실제 잘 닦지도 못 한다.
구두를 닦지 않는 웃기는(?) 군대를 나온 나는
군대를 졸업한 대한민국의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익히고 오는 기본기 중의 하나인 구두 광내기를 나는 놓쳤다.
그외 기본기란 : 빨래와 다리미, 요리, 짜리. 곤조, 뻥 등이 있다...-_-;
한 때는 사무실에 고정으로 닦는 분께 맞겨서 부지런히 닦고 다닌 적도 있었지만
요즘은 1년에 몇 번 내 손으로 닦는 일을 빼고는 거의 닦지 않는다.
덕분에 구두는 쉽게 망가지고, 아까 그 구두방의 주인장은 늘 내 구두의 가죽들은
영양실조라고 놀려 대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그냥 다닌다...-_-;
내가 게으런 탓도 있고, 몇 년새 닦는 값도 많이 오르긴 했지만
실제 안 닦는 이유는 닦고난 구두는 너무 반짝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구두 닦은 날의 나를 보면
구겨진 바지, 길거나 짧은 상의, 웬만큼 후줄근한 옷차림에 유난히 반짝이는 구두....
정작 사람은 안 반짝이면서 구두만 반짝이는 게 너무 웃겼다.
가만 생각해보니 난 낚시대도 안 닦는다....-_-;
일 년에 한 번 닦을 까 말까...?
남들은 한 번 출조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낚시대 뿐만아니라 릴도 닦고, 라인엔 드레싱까지 한다고 하던데,
심지어 난, 바다를 다녀와도 냄새만 맡다가 다음 물에 갈 때 캐스팅하느라 겸사겸사 씻고 만다.
게으른 주인 잘못 만난 탓에 장비들이 고생일 것 같지만
이 역시 반짝이는 장비를 들고 다니기 싫은 버릇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비싼 유명 메이커의 낚시 장비를 갖추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로 변명하고 싶다.
뭐 물론 돈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다...-_-;
내가 하는 낚시는 내 장비만큼 반짝이는 낚시일까?
낚시대만큼 곧고 유연하며 탄성을 지녔을까?
릴만큼 둥글고 부드럽고 경쾌한 소리를 낼까?
라인만큼 아름답고 자유로운 루프를 그려낼까?
다시 한번 물질이나 환경, 남의 눈에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낚시로 남기를 기원한다.
물론 생활도 그러하기를....
주인장의 광내기가 끝나기 전에 난 얼른 덧붙인다.
" 아저씨 광은 좀 덜나게 해주세요...-_-; "